슈퍼카의 대명사, 엔초 페라리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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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카의 대명사, 엔초 페라리에 대해 알아보자

여러분은 슈퍼카를 떠오르면 어떤 차가 가장 먼저 생각나십니까? 제가 맨처음 슈퍼카를 접한 브랜드는 페라리입니다. 그래서인지 페라리에 대한 로망은 여전히 식지 않고 제 맘속에 남아있습니다. 오늘은 이런 로망을 키우게 된 페라리의 발자취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 정보를 준비해보았습니다. 한번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엔초 페라리는 누구인가?

엔초페라리는는 1898 년 2 월 18 일 이탈리아 모데나 에서 태어났으며 폭설로 인해 아버지가 지역 등록 사무소에서 출생을 보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출생이 2 월 20 일에 기록 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의 출생 증명서는 그가 1898 년 2 월 20 일에 태어났으며 출생 등록은 1898 년 2 월 24 일에 되었으며 조산사에 의해 보고되었습니다. 그는 알프레도 페라리와 식료품 점의 아들이며 가족 가정에서 금속 부품을 제작하는 워크샵을 시작했습니다. 엔초는 정식 교육이 거의없이 자랐습니다. 1908년 10살이었던 엔초는 레이싱 우승경기를 처음으로 관전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게 그에게 있어서 페라리를 만들게 된 가슴 뛴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후 시간이 지나고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이후 엔초는 이탈리아 3차 포병연대에 입대하여 참전하여 복무하였으며, 그 무렵쯤 엔초의 아버지 알프레도와 형이 독감으로 인해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엔초도 당시 독감으로 크게 앓아누었지만, 회복하며 혼자만 퇴원을 하게 됩니다.

엔초 페라리의 자동차 인생시작

아버지와 형의 사망으로 인해 가내수공업을 이어오던 목공 사업이 문을 닫게되면서 엔초 페라리는 본인이 이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던 자동차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됩니다. 당시 밀라노의 자동차 제조회사인 cmn의 테스트 드라이버로 일하는 동시에 트럭 차체를 승용차로 제조하는 일도 하였습니다. 그 후 1919년 엔초 페라리는 처음으로 레이싱 대회에 출전하여 전체 4위를 기록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선 상당히 의미가 있었던 대회라고 볼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같은해 11월에는 targa 대회에도 참여하였지만, 엔진 탱크의 누출로 인해 성공적인 대회로 마무리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 후 1920년에는 알파 로미오 레이싱팀에 드라이버로 정식 합류하게 되었으며 1923년에는 처음으로 그랑프리 수상을 이루게 되며 1년후 1924년에는 3개의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게 되는 쾌거를 이루게 됩니다. 하지만 동료 였던 안토니오가 주행중 사고로 인해 사망하게 되자 엔초 페라리는 깊은 충격에 빠지게 되었으며, 1932년 그의 아들 알프레도 디노가 태어난 이후부터는 경주 차량 관리와 개발에 더욱 집중을 하게 됩니다.

본인의 브랜드를 창조하다

그렇게 되면서 엔초는 자신만의 최고의 레이싱팀을 구성하게 되었으며, 당시 최고의 드라이버들을 영입하여 총 11번의 우승이라는 뛰어난 결과를 얻은 후 레이싱 드라이버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사실 이전부터 페라리의 시작은 예고되고 있었습니다. 페라리의 엠블럼인 말은 1차대전 당시 전투기 조종사이었던 바라카가 출격전 페라리에게 목걸이로 걸어준 문양을 본 따서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알파 로미오에 속한 당시에는 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갈등이 심화되었지만, 이 후 페라리가 자신만의 회사를 만든 이후 1947년 처음으로 페라리 엠블럼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엔초 페라리는 본인만의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서 강한 개성과 추진력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룸과 동시에 경영스타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기도 했습니다. 본인이 한번 추진하겠다고 이야기하면 반드시 해야하기 때문에 그들의 부하 직원이나 동업관계자들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집이 워낙 강하고 성격이 불 같은면 때문에 악감정을 두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이러한 그의 강인함과 불도저같은 추진력으로 인해 회사의 발전도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말같은 추진력자 엔초 페라리

몇 가지 웃긴 일화를 살펴보면, 그는 미국의 자동차인 포드 창업자와도 동업관계를 이어오고 있었으며, 당시 포드는 슈퍼카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엔초에게 밝혔지만, 미국사람이 무슨 슈퍼카를 만드냐 라는 조롱과 악담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이에 포드는 화가 치밀어 올라 만든 차량이 포드gt입니다. 또한 동시대의 람보르기니는 농기구를 만드는 기업이었습니다. 당시 람보르기니는 트랙터를 분해하던 도중 최고급 페라리 부품을 발견하게 되어, 기술을 전수받고자 엔초에게 갔지만, 당신은 트랙터 운전이나 해라 라는 독설을 듣게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독기를 품은 람보르기니는 슈퍼카 개발에 들어갔으며, 회사의 모토는 ‘페라리보다 빠른 차’ 라고 합니다. 엔초 페라리의 독설로 인해 세계적인 명차 브랜드가 두 개나 생기게 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다른 의미에서 자동차 산업의 큰 획을 그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그의 자신감은 실력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베스트 드라이버이자 개발자로도 뛰어난 능력을 가진 페라리는 자신의 차량으로 5000회 이상의 우승을 거머쥐고 세계 타이틀 20여개나 획득하는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엔초 페라리는 1988년 f40이 출시되기 전 사망하였으며, 그 전까지 하루라도 일을 쉬지 않고 매달릴 정도로 엄청난 일중독이었다고 합니다. 그후 현재는 공도에서 누구나 꿈꾸는 차량으로 손꼽히게 되었으며, 성공의 상징으로도 불리우는 차량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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